사실 림춘추동지는 명석한 두뇌와 높은 의술, 재치있는 필치로 하여 어려운 항일혁명을 하지 않고도 제밥벌이를 얼마든지 할수 있는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사선의 고비를 수십수백번이나 넘으면서도
그는 룡정감옥에 갇혔을 때 자기가 죽어도 혁명은 승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자기 개인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혁명조직과 동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적들의 야수적인 고문을 이겨냈다. 자기가 죽으면 혁명도 의의가 없다고 생각하며 조직과 동지들이 피해를 입더라도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고문에 굴복한 배신자들과는 대조되는 여기에 림춘추동지의 혁명에 대한 충실성,
이러한 그였기에 해방후 중국 동북지방에 전권대표로 파견되여갈 때 항일혁명렬사의 자녀들을 많이 찾아 조국으로 내보낼데 대하여 주신
누데기를 걸친 람루한 행색의 아이들이 광고를 보고 찾아올 때마다 림춘추동지는 그들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너는 누구의 아들이구나, 너는 누구의 딸이지,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얼마동안 지방에서 활동한적이 있었는데 평양에 회의를 올 때마다 그는 시내의 려관에서 류숙할 잡도리를 아예 하지 않고 곧장 모란봉에 올라가 투사들의 묘소옆 잔디밭에 백포를 펴고 잠을 자군 하였다고 한다. 한지에서 전후좌우에 전우들의 무덤이 있는 산등성이에서 한장의 백포에 몸을 맡기고 그는 《이 사람들아, 조국이 당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고있는 때에 당신들은 어찌하여 이곳에서 잠들고있는가. 장군님께서 지금 조선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시고 얼마나 고군분투하시는지 아는가?》고 하면서 무덤속의 전우들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때여서 시민들중에는 모란봉의 무성한 초목속에서 투사들의 혼백이 고이 잠들고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들이 그닥 많지 못하였고 더우기 어떤 허우대 큰 사나이가 이따금씩 그 혼백을 안고 자다가는 첫 아침에 조용히 모란봉에서 내려오군 한다는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것이 항일유격대식의리, 조선혁명의 첫 세대들이 지니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