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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있는 음악가 박연

    지난날 조선력사에 알려진 재능있는 음악가로서는 고구려의 왕산악, 가야의 우륵과 함께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박연을 일러오고있다. 1378년(우왕 4년)에 양광도 영동(충청북도 영동군)의 몰락한 량반가정에서 태여난 박연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재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글공부를 하는 여가에도 음악을 배우고싶어 마을에서 살고있는 악공을 찾아가 피리와 저대를 배웠으며 《률려신서》를 비롯한 악서들을 읽으면서 악률에 대한 원리들을 깊이 체득하였다.

    1405년(태종 5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수도로 올라온 박연은 음악지식을 높이려고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부서인 리원(전악서)을 찾아갔다. 그가 저대로 한곡조 불자 악공은 음절이 고르지 않고 가락도 맞지 않소라고 하였다. 그래도 그가 꾸준히 다니며 음률을 익히였는데 며칠후 악공은 박연에게 《가르칠수 있는분이요》라고 하더니 며칠뒤에는 《벌써 테두리가 잡히였소. 장차 명수가 될듯 하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는 무릎을 꿇고 《나로서는 당할수가 없습니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후 박연은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언부 지평을 하였으며 세종시기에는 관습도감의 제주로 임명되였다. 박연은 아악관계의 리론적인 문제들과 악률, 아악기들을 연구하고 민족적인 궁중음악을 새롭게 정비하며 악기제작사업을 진행하였다. 박연은 총보형태의 악보인 정간보를 창안하여 궁중음악유산들을 보존하고 전수할수 있는 토대를 갖추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력사에 이름을 남긴 음악가들을 보면 악기연주를 뛰여나게 잘하든가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또는 악률리론에 정통한 사람, 음악창작에 기여하였든가 악기제작을 잘 하는 등 일정한 분야에서 그 재능이 발휘되였지만 박연은 높은 연주기량과 함께 악률리론에도 정통하고 악기제작과 악보편찬사업에도 능하였으며 민족음악발전에 크게 기여한 뛰여난 음악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