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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신정변은 조선에서의 첫 부르죠아개혁이다.

    갑신년(1884년)에 있었다고 하여 갑신정변이라고 부른다.

    갑신정변은 근대사회에로 지향하는 조선사회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일어났다.

    봉건통치제도의 개혁과 나라의 부강발전을 바라는 인민들의 투쟁이 강화되는 속에서19세기 50년대에 자본주의적관계의 발전을 반영한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60~70년대 초에 이르러 개화사상은 더욱 성숙되여 사상적탐구단계로부터 새로운 선진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실천단계에로 넘어가게 되였다.

    1870년대 초 김옥균(1851-1894)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인 개화파가 형성되였다.

    개화파의 활동목적은 외래침략을 막고 국권을 수호하며 봉건제도를 혁신하고 나라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것이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활동은 점차 수구파반동통치배들의 반항에 부딪쳤으며 새로운 정세하에서 국정개혁과 같은 평화적방법으로는 부르죠아개혁의 과업을 수행할수 없다고 인정하고 폭력적방법으로 수구파반동정권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개화파는 계획된대로 1884년 10월 17일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개화파는 10월 18일 새 정부구성을 전국에 공포하고 19일에는 14개 조항으로 된 새 정부의 정강을 발표하였다. 정강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사회정치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낡은 봉건제도를 자본주의제도로 개혁할데 대한 문제가 제기되였다.

    부르죠아개혁사업이 성과적으로 추진되고있을 때 수구파잔당들과 결탁한 청나라군대는 19일 오후 불의에 개화파정부가 자리잡고있는 창덕궁을 공격하여왔다. 이때 왕궁수비에 동원되였던 일본군대가 약속을 배반하고 도망쳐버림으로 하여 얼마안되는 개화파의 무력은 량적으로 우세한 적을 당해낼수 없었다. 이리하여 정변후 사흘만에 개화파정부는 무너지고 부르죠아개혁은 《3일천하》로 끝났다.

    정변의 실패로 부르죠아개혁을 실행할수 없게 된 김옥균은 일부 개화파성원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4년 부르죠아개혁이 실패하게 된 주요원인은 무엇보다도 이 개혁을 담당하여야 할 사회계급적력량인 부르죠아지가 정치경제적으로 미약한것으로 하여 부르죠아계급의 사회정치적 및 물질적지원을 받지 못한데 있다.

    또한 이 개혁을 담당하여 나섰던 개화파들의 정치사상적제한성으로 하여 부르죠아개혁에서 기본문제인 토지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할데 대한 강령을 제기하지 못하고 당시 조선에서 기본계급인 농민대중을 투쟁에 조직동원하지 못한데 있었다.

    또한 부르죠아개혁을 담당한 개화파들이 적아간의 력량관계를 정확히 타산하지 못하였고 옳은 전술적방침을 세우지 못한데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1884년 부르죠아개혁은 실패하였으나 이것은 조선력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이 개혁은 조선의 사회발전의 합법칙적과정을 반영하여 일어난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성격을 띤 부르죠아개혁으로서 조선근대사발전에서 획기적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였다.

    이 개혁은 또한 그후 조선의 부르죠아민족운동발전을 고무추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