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47(1958)년 5월 1일
그러시면서 일군들에게 대성산의 력사에 대하여 다시금 알기쉽게 가르쳐주시였다.
고구려는 427년(장수왕 15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게 되였는데 이때부터 대성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성으로 되였다고 한다.
고구려가 평양지방을 개척하게 된것은 남방진출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데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평양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있을뿐만아니라 동서를 련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농업을 비롯한 경제와 문화발전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곳을 도읍지로 선택한 고구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성산에 여섯개의 봉우리를 잇는 25리구간에 성벽을 쌓았으며 대성산남쪽기슭에 방대한 규모의 안학궁을 건설하여 강성한 나라의 위력과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이 물을 해결하기 위하여 성안에 우물대신 못을 파게 되였다. 전해진데 의하면 못이 99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때 고구려사람들은 못을 파서 물을 채우고 그 아래켠에서 물을 받아서 먹는 여러개의 우물을 만들어씀으로써 많은 음료수를 해결할수 있게 하였다.
일군들은 산 자체를 대성산이라고 부르고 거기에 국사봉, 주작봉, 북장대를 내놓고 그 나머지는 똑똑한 이름이 전해지는것이 없다고 말씀드렸다.
옛날에는 구룡산, 료양산으로 불리우던것이 고구려인민들이 성을 쌓은 다음부터 대성산으로 불리워왔고 또 고구려의 력사유적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와 그 이후 평양8경의 하나로 손꼽혀왔지만 봉우리들의 이름이 제대로 다 전해지고있지는 못하였다.
그러시고는 친히 대성산축도를 가리키시면서 제일 가운데 있는 봉우리를 장수왕이 대성산에 성을 쌓고 평양으로 천도한 공적을 전하는 뜻에서 《장수봉》이라고 하고 이 봉우리는 을지문덕의 이름을 남기기 위하여 《을지봉》으로 하며 그 다음 봉우리는 연개소문의 업적을 기념해서 이름을 붙이자고 교시하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