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를 입력하십시오. 금지문자입니다.

    왕산악은 고구려사람으로서 4세기 전반기에 민족악기 거문고를 창안제작하고 그 연주기법들을 발전시켰으며 거문고악곡들을 창작하여 거문고음악의 시초를 열어놓은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음악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거문고는 고구려시기 왕산악에 의하여 만들어진 악기입니다.》

    강력한 국력과 발전된 문화로 고구려의 대외적권위는 날로 높아지고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던 4세기 전반기에 진나라에서 7현금이란 악기가 들어오게 되였지만 그 악기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던 왕산악은 그 악기의 연주법을 수월히 알아내고 연주법도 익히게 되였으며 그것으로 고구려음악을 연주하는 과정에 악기의 약점까지도 간파하게 되였다. 왕산악은 음색이 맑고 음량도 더 크며 연주에 편리할뿐아니라 민족적정서의 음악형상에 적합한 새 악기를 만들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울림통은 장방형으로 하고 현의 수는 6현으로 하였으며 새롭게 괘를 첨가한 현악기 거문고를 창안제작하였다. 그는 음색이 시원스럽고 민족적정서의 음악형상에 적합한 거문고를 즐겨 연주하면서 다양한 연주기법들을 발전시켰으며 수많은 거문고곡들을 창작하였다.

    왕산악의 거문고연주솜씨가 얼마나 훌륭하였는가는 옛문헌 《삼국사기》(권 32 악지)에는 그가 악기를 탈 때 난데없는 곳에서 검은 학이 날아와 너울너울 춤을 추었으며 그로부터 악기이름을 《현학금》(후에 현금)으로 부르게 되였다고 한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거문고의 웅글지고도 장쾌한 음색과 활달하면서도 시원스러운 주법들은 고구려사람들의 호탕하고 락천적인 정서와 기질에 잘 맞았고 민족적인 색채의 연주형상에도 편리하여 삽시에 널리 보급되였으며 고구려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되였다. 거문고가 고구려각지에 널리 보급된 사실은 태성리1호무덤(4세기 전반기)과 고국원왕릉(4세기 중엽)의 안칸에 6현금이, 집안 (통구)12호무덤(4세기 후반기), 춤무덤(4세기말~5세기초), 장천1호무덤(5세기 중엽), 집안다섯무덤의 4호무덤, 5호무덤(6세기) 등의 벽화들에 그 연주도가 그려져있는것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고구려의 거문고는 백제, 신라에도 전해졌으며 이웃 나라들에까지 알려졌다.

    고구려의 정신과 기백이 어려있고 민족적인 음악형상에 적합한 거문고는 그후 제작기법이 보다 발전하고 연주법도 더욱 편리해졌으며 민간에 널리 보급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거문고는 《백악지장》으로 일러왔으며 선비라면 의례히 거문고연주를 할줄 아는것이 례상사로 되였다.

    근대에는 중세 거문고연주법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높은 기교의 거문고독주곡 《거문고산조》도 창조되였다.

    거문고는 가야금을 탈 때와 같은 자세에서 오른손에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쥐고 줄을 내리튕기거나 떠서 연주한다. 왼손으로는 줄을 눌러 음정을 맞추며 넷째손가락에는 작은 골무를 끼고 강한 롱현을 한다.

    해방후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문예정책에 의하여 거문고음악은 더욱 발전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55(1966)년 7월 몸소 학생들이 연주한 거문고합주 《출강》을 보시고 높은 평가를 주시였는데 이 작품은 민족적색채가 강하면서도 조선인민의 투쟁모습을 잘 형상한 거문고곡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의 거문고애호가들속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명곡의 하나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