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666년)은 7세기 중엽 조선의 첫 봉건국가 고구려의 애국명장이였다.연개소문은 어려서부터 무술과 병법에 능하였으며 풍채가 좋고 성품이 호탕하였다.아버지가 돌아가자 그 뒤를 이어 서부대인으로 되였다.
618년에 수(581년-618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봉건국가)나라왕조가 망하고 그 다음에 세워진 당(618년-907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봉건국가)나라는 고구려에 대하여 얼마동안 평화적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는척 하다가 저들내부가 좀 안정되자 본성을 드러내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나라사이의 불화를 리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는데로 나갔다. 그들은 횡포하게도 고구려의 내정에 간섭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내부형편과 군사비밀을 탐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류왕(고구려의 32대왕)을 비롯한 집권자들은 당나라의 압력앞에 굴복하는 비겁한 자세를 취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들을 반대하여나섰다. 그는 642년 10월 정변을 일으키고 영류왕을 비롯하여 반대파대신 100여명을 처단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왕(보장왕)의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나라의 군사권과 행정권을 다 틀어쥔 막리지(고구려봉건국가의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군사통수권을 틀어쥔 왕 다음가는
또한 그는 당나라와 결탁하여 고구려를 반대하여 나선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644년 당나라가 사신을 보내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것을 권고하였을 때 그것을 단호히 일축하였으며 그뒤 또다시 보내여온 당나라사신이 고구려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거만하게 행동하자 그를 굴간에 가두어버리였다.
당태종은 고구려에 대한 전쟁준비를 다그쳐 오다가 645년 4월에는 수십만의 륙군과 수군으로 고구려에 침공하여왔다.연개소문은 고구려군민을 반침략투쟁에로 조직동원하였다. 고구려군민들은 료동지방(오늘의 중국)의 여러 성들에서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료동성(중국료동반도 료하류역에 있던 고구려의 성)전투후 전선의 중심은 안시성으로 옮겨졌다. 안시성안의 군민들은 하루에도 여러차례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들을 그때마다 보기 좋게 물리치였다.적들은 60일간에 걸쳐 흙산을 쌓고 성벽을 넘어보려고 발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처럼 645년 당나라침략자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군민을 조직지휘함으로써 전쟁승리를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연개소문은 647년, 648년에 계속된 당나라군대와의 싸움에서도 고구려군민을 옳게 조직동원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집요하게 달려드는 당나라군대의 침공을 그때마다 격파하였다. 특히 661년이후 신라가 당나라군대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강점하려고 접어들었을 때에도 능숙한 전법으로 적들을 쳐물리쳤다.
당시 용맹스러운 연개소문에게서 얼마나 된타격을 받군 하였던지 당나라에서는 《연개소문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뚝 그쳤다는 이야기까지 전하여지고있다.
이처럼 외적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명장으로 력사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