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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대표적인물 정약용

    정약용(1762-1836)은 조선봉건왕조 말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그는 1789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수찬, 승지, 병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반대파들에게 한때 천주교관계자였다고 지목되여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뒤에도 충청도 금정찰방, 황해도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1801년 천주교도들을 처단한 《신유사옥》에 걸려들어 그 련루자로서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18년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농촌생활을 직접 보고 자기의 실학적견해를 더욱 심화시킬수 있었다.

    1818년 귀양살이에서 풀려 나온뒤에는 벼슬살이와 인연을 끊고 여러 부문의 학문연구와 저술사업에 더욱 힘썼다.

    그는 땅이 둥글고 자체로 운동한다는 설을 인정하였으며 비, 눈, 우뢰, 인물 등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그것이 신비스러운 현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술을 발전시킬것을 강조하면서 그는 직접 농업, 방직, 선박건조 및 교량건설, 성건축 등에 관한 연구사업을 하였다.

    그는 수원성을 설계하였고 이 성을 쌓는데서 큰 역할을 논 거중기(기중기)도 창안하였다.

    1800년에는 실학자 박제가와 함께 종두술을 실험연구하여 성공하였다.

    자연 및 기술과학에 대한 그의 연구성과는 18세기말~19세기초 조선의 과학기술발전에서 큰 기여로 되였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게 되였다.

    정약용은 조선의 력사, 지리, 언어에 대하여서도 깊이 연구하여 그것을 상당한 높이에로 발전시켰다. 그는 나라의 경제발전을 저애하며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썩어빠진 통치배들의 정치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당시 첨예한 사회정치적문제로 되고 있던 문벌제도의 페지 및 인재본위의 관리등용, 환곡제도의 페지 등 일련의 제안을 내놓았으며 《원목》, 《탕론》, 《전론》 등의 글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여러 분야에 관한 자신의 《리상적》구상에 대하여 썼다. 또한 《려전법》을 실시하여 동리를 단위로 농사를 짓게 하고 《일역부》에 따라 자기 몫을 받고 세납과 병역의무를 지도록 하자는 의견도 내놓았다. 그는 《려진법》을 실시한다면 각 계층의 리해관계를 조절할수 있으며 국력도 충실해지고 국방력도 강화될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내놓은 사회경제적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견해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였다.

    그러나 그도 다른 실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근로인민의 리익을 대변할수 없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그가 제기한 정치개혁안들에서는 당시 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이 인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있던 사실을 비교적 예리하게 폭로한 부분도 있으나 그것은 봉건유교적정치관에 기초하여 어지러워진 봉건통치제도를 강화하기 위한것이였다. 또한 《원목》이나 《탕론》에서 그가 말한 백성이란 노비신분인민들을 제외한 계급과 계층을 념두에 둔것이였으며 《전론》에서 제의한 대책은 농본사상에 기초하여 대토지소유자들에 대한 토지겸병과 가혹한 착취를 다소 조절함으로써 전체로서의 지배계급의 리익을 더 잘 보호하자는것이였다.

    《리진법》도 봉건유교사상에 기초한 제한이였으므로 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노비문제와 같이 봉건통치계급의 근본리익에 직접 저촉되는 제도에 대하여서는 변경을 반대하는 립장에 서있었으며 또한 농민폭동에 대하여서는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정약용은 뛰여난 문학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에서 《뜻》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모방주의, 형식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시 《굶주리는 백성의 노래》, 환곡제도의 페단을 형상한 시 《하일대주》, 군포수탈의 가혹성을 형상한 시 《애절양》 등을 비롯하여 2 000여편의 시문을 남겼다.

    그는 자기 작품들에서 인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하고 관료배들의 가혹한 수탈행위를 폭로하였다.

    정약용은 조선봉건왕조 말기에 진보적량반계층의 립장에서 극도로 부패타락한 봉건통치배들의 죄행을 폭로하고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그가 쓴 글들은 《여유당전서》에 실려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