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B.C. 277-A.D. 668년)는 근 천년동안 존재하면서 외래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선조의 옛땅을 찾고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 동방의 강국이였다.
고구려는 강한 상무기풍과 높은 경제력으로 하여 국력이 막강하였으며 동서6천여리, 남북4천여리에 달하는 넓은 령토를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시조왕은 고주몽이였다. 고주몽은 B.C. 298년 부여의 높은 귀족가문출신인 해모수와 청하(압록강)남쪽의 지방세력자였던 하백의 딸 류화사이에서 태여난 아들로서 부여의 왕궁에서 성장하였다. 동명왕에 의한 고구려의 건국은 고구려지역에서 봉건제도를 주도적인 사회제도로 되게 함으로써 고구려사회의 발전을 다그치게 하였으며 봉건사회력사의 시원을 열어놓았다.
고구려는 조선의 력사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강한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갖추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동방의 강국으로 이름을 떨치였다.
고구려는 황제국으로서 《건흥》, 《영락》, 《연수》, 《연가》라는 자기의 독자적인 년호까지 가지고있었다. 국왕은
고구려는 자체내부의 경제와 문화를 가일층 발전시켜나갔으며 정치제도를 끊임없이 정비강화함으로써 봉건제도를 더 성숙시키고 공고한것으로 되게 하였다.
고구려사회는 봉건지주계급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기본생산수단인 토지와 그밖의 중요생산수단에 대한 봉건적소유에 기초하여 인민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봉건사회였다.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는 고구려사회관계의 기초를 이루고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상무기풍이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군사를 배우고 신체를 단련하였다.
고구려는 국토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완수하며 외래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위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를 세우고 강화해나갔다. 크게 륙군과 수군으로 구분되여있었으며 그밖에 전문병종부대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개마무사는 사람과 말이 다 온 몸체를 철갑옷으로 무장한 군대로서 《철기》라고 불리웠다.
고구려에서는 봉건적의무병제가 실시되였다.
고구려가 근 천년간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고수할수 있었던 강대한 정치적, 군사적힘은 나라의 경제력에 기초하고있었다.
고구려의 경제에서는 농업과 수공업이 위주로 되고있었으며 여기에 집짐승기르기와 사냥이 배합되여있었다. 농업생산에서는 조를 가장 많이 심었고 보리, 콩 등 5곡을 재배하였다. 철제수공업과 요업, 방직수공업이 매우 발전하였으며 염색기술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회화미술에서는 일반화와 함께 벽화가 발전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조선민족사발전에서 큰 역할을 한 천년강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