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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희(942-998)는 조선력사에 알려져있는 고려전기의 유능한 외교활동가였으며 애국적장군이였다.

    9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 내의시랑 등을 거쳐 평장사 문하시중의 벼슬을 지내였으며 972년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고 983년 병관어사에 이르렀다.

    서희는 993년 거란이 수십만 대군으로 고려에 침입하자 중군사가 되여 방어군을 거느리고 서경(평양)에 주둔하였다. 초기에 싸움이 불리하게 되자 비겁한 봉건통치배들속에서는 적들에게 항복하거나 서경이북지역을 내주자고 제의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국왕도 동요하였다. 이때 서희는 항전을 계속할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고려의 강력한 군사력과 인민들의 항전기세에 위압된 적들은 그후 청천강남안의 안융진(안주 서남)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자 군사적모험을 계속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담판을 통하여 침략의 목적을 달성해 보려고 하였다.

    고려군민의 비등된 열의와 항전기세에 고무되여 적장과의 담판에 나선 서희는 적 우두머리 소손녕에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나라이름까지 고려라고 하였다. 지경을 가지고 론한다면 너희들이 차지하고 있는 동경(료양)까지도 우리의것이다》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 달라》는 적장의 황당한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서희는 거란과의 국교문제도 론의의 초점을 고구려의 옛 땅문제로 끌고갔다. 그는 압록강안팎이 원래 다 우리 나라 땅인데 지금 거란이 그것을 강점하고 길을 막고있기때문이니 거란과의 국교는 녀진을 내몰고 압록강안팎의 땅을 회복한 다음에야 가능할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동적이며 능란한 외교활동에 의하여 적들은 담판에서 완전히 피동에 빠지게 되였다. 고려군민의 강력한 항전에 맞설수 없었고 담판에서 궁지에 빠진 적들은 마침내 물러 가지 않을수 없었다.

    그후 그는 평장사가 되여 994년-997년에 다시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이남 여러 지역에 성 쌓는 일을 지휘하여 서북지방의 방비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렇듯 서희는 높은 애국심을 지니고 외래침략자들을 쳐부시는 전투에서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하였으며 용의주도하고 정정당당한 외교활동을 진행하여 전쟁승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애국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