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는 고려(918-1392년) 초기부터 리용된 오랜 돌다리이다.
이 다리는 고려말기에 국가의 고위관료였던 정몽주가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장소인것으로 하여 유명해졌다.
선죽교는 숭양서원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개성시의 선죽동에 위치하고있다.
선죽교의 본래 이름은 선지교였다. 선지교가 선죽교로 불리우게 된것은 고려말기에 있은 하나의 사건과 련관되여있다.
당시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정몽주의 집은 서쪽에, 리성계(후에 조선봉건왕조의 태조로 됨)가 살던 집은 동쪽에 있었다. 정몽주와 리성계는 고려의 불교정치에 불만을 품고 유교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던 신진개혁파인물들이였다. 리성계는 유교지지세력을 리용하여 왕권을 빼앗으려는 야욕을 품고있었다. 이를 알게 된 정몽주는 극력 반대하였다. 리성계는 당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시할수 없는 존재였던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당겨 왕권탈취음모에 가담시키려고 꾀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리성계는 그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회유하면서 그의 속마음을 타진해보았다.
정몽주는 리성계일당앞에서 자기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죽으면 죽을지언정 고려에 대한 충정은 버릴수 없다는 확고한 결심을 담은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들은 리성계일당은 정몽주의 마음을 절대로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여 이 일당은 리성계의 집을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우에서 쇠몽둥이로 살해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된 다음 다리우에서는 참대가 돋아났다고 한다. 참대는 예로부터 굳은 절개를 상징하였다. 당시 개성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애석함을 금치 못해하면서 원래 《선지교》라고 부르던 다리이름을 《선죽교》로 고쳐불렀다 . 지금도 다리우에 있는 검붉은 자욱이 그가 흘린 피자욱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다리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돌기둥들을 세우고 그우에 보들을 가로놓은 다음 보사이에 바닥돌들을 놓았다. 다리의 길이는 8.35m이고 너비는 3.36m이다.
선죽교에는1780년에 정몽주의 후손이 설치한 란간이 있다. 그는 이 란간을 설치하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선죽교곁에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정몽주의 애국충정을 길이 전하기 위해 만든 여러 유적들이 있다.
주변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찬양하여 세운 《읍비》(1641년)와 하마비,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명필인 한석봉(1543-1605년)이 쓴 선죽교비, 정몽주의 충절에 감동되여 그의 시신을 거두어준 고려의 관료 성여완의 집터비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선죽교는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민족문화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원상그대로 보존되고있다.